한국 현대미술계에서 '조용한 혁명가'로 불리는 김범(Kim Beom)은 개념미술이라는 장르 안에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온 작가입니다. 그의 작품은 대단히 단순하거나 소박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날카로운 풍자와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현대사회에 익숙한 사물과 개념을 통해 새로운 인식의 틀을 제시하며, 관람객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김범 작가의 예술 세계를 본 글에서 집중 조명해 봅니다.
개념미술의 관점에서 바라본 김범의 작업 세계
김범 작가는 1963년 대구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런던 첼시 미술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초기부터 ‘개념미술’에 천착해왔습니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나 조각의 경계를 넘어서 언어, 행위, 오브제, 영상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예술을 사고의 장으로 확장하는 작업을 지속해 왔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초기작 <생각하는 책상>은 단순히 책상 위에 있는 물건을 배치하는 작업이었지만, 이를 통해 ‘지식의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런 방식은 단순한 설치미술이 아니라 철학적·사회적 맥락을 촉진하는 일종의 시각적 논문과도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범은 사물 자체보다 ‘그 사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 방식’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대표적으로 <말하는 나무> 시리즈에서는 식물에게 언어를 학습시키는 듯한 영상작업을 통해 ‘의사소통의 주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비판합니다. 이처럼 김범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일상 속 개념을 예술의 언어로 풀어내며, 관객으로 하여금 새로운 시선을 갖게 만듭니다.
언어, 사물, 일상: 김범 예술의 세 가지 키워드
김범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언어’, ‘사물’, 그리고 ‘일상’입니다. 이 세 요소는 그의 작업 세계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아이디어가 여러 작업으로 확장되곤 합니다. 첫째, ‘언어’는 김범 작업의 중요한 기초입니다. 그의 대표작 <사물의 교과서 시리즈>는 실제 초등학교 교과서를 패러디해 만든 작업인데, 여기서 김범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배운 상식과 정의가 실제 사물의 본질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유머러스하게 보여줍니다. 둘째, ‘사물’은 그의 작품에서 또 하나의 중심 소재입니다. 김범은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의자, 책, 나무, 컵, 돌 등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하지만 이 사물들은 단순히 조형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아를 가진 것처럼 묘사되기도 하고, 인간의 언어를 배우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식으로 재구성됩니다. 셋째, ‘일상’은 김범 예술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입니다. 그는 고급 미술 재료나 화려한 연출을 지양하고, 우리가 늘 접하는 사물과 상황을 통해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냅니다. 그의 영상작업이나 드로잉, 설치물 등은 종종 유머러스하고 친근한 형태를 띠지만, 그 안에는 현대사회에 대한 비판, 인간의 인식 구조에 대한 탐구가 담겨 있습니다.
국제 미술계의 김범: 왜 그가 ‘조용한 거장’으로 불리는가
김범 작가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 미술계에서도 꾸준히 주목받아 왔습니다. 특히 미국, 영국, 독일, 일본 등에서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에 초청되며, 국제적인 입지를 다지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한국 현대미술’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넘어 전 지구적 이슈와 철학적 담론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는 대중적 스타 작가는 아니지만, 미술계에서는 ‘예술가의 예술가’로 통합니다. 다른 작가들이 그의 전시에서 영향을 받거나, 그의 작업 방식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범의 작업은 복잡하거나 거대하지 않지만, 바로 그 단순성 속에서 개념적 밀도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술 세계는 단순히 아름답거나 흥미로운 것을 넘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들이 과연 진실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며, 관객의 지각을 전복시킵니다.
김범 작가는 거창하지 않은 방식으로 관객의 사고를 흔드는 예술가입니다. 그는 우리 주변의 사물, 언어, 일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발견한 낯섦을 작업으로 풀어냅니다. 그의 예술은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며, 예술이라는 것이 단지 아름다운 조형물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증명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김범은 조용히, 그러나 날카롭게 우리 사회와 인간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단지 미술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나 자신을 다시 한번 성찰하게 되는 경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