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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t Lives》 감상문 ― 우리가 만난 모든 시간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by 해피해-5 2025. 6. 20.

PAST LIVES 포스터 이미지

《Past Lives》 감상문 ― 우리가 만난 모든 시간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어떤 영화는 기억 속에 오래 남는다. 그것은 화려한 영상이나 반전 때문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스크린 밖으로 흘러나와 조용히 마음을 흔들기 때문이다. 셀린 송 감독의 데뷔작 《Past Lives》는 바로 그런 영화다. 한국과 미국이라는 두 도시, 그리고 그 도시를 가로지르는 시간 속에서 한 사람의 인생과 사랑, 운명, 관계의 본질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영화는 과장된 감정 대신 정적을 택하고, 소리 없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러나 그 미세한 진동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가슴 안에 남아 울린다.

《Past Lives》는 어린 시절 한국에서 함께 자란 ‘나영(노라)’과 ‘해성’이 헤어진 후, 12년, 다시 12년의 세월을 두고 서로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재회나 로맨스의 서사가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인간관계 속에서 흘러가는 감정의 결, 그 사이의 공백,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정면으로 응시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현재의 뉴욕. 어느 바에서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세 사람이 앉아 있다.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관계일까. 관객은 그 장면을 머릿속에 남겨둔 채 과거로 돌아간다. 서울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 노라와 해성은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함께 웃고 걷는다. 그러나 노라의 가족이 이민을 가게 되면서 두 사람의 운명은 엇갈린다. 어린 마음으로도 서로를 특별하게 여겼던 감정은 말로 끝맺지 못한 채 멀어진다. 그리고 영화는 그 ‘말하지 못한 것’들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추적한다.

12년 후, 성인이 된 두 사람은 SNS를 통해 다시 연락을 주고받기 시작한다. 서울과 뉴욕, 서로 다른 언어와 시간대에서 나누는 영상통화는 감정의 간극을 좁히는 듯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현실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해성은 여전히 한국에 살며 과거의 연장을 따라 살아가고, 노라는 뉴욕에서 예술가로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간다. 그리고 또다시 이 감정은 흐려진다. 사랑은 있지만, 그 사랑을 지킬 수 있는 삶의 조건은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침묵의 사용이다. 노라 역의 그레타 리, 해성 역의 유태오, 그리고 노라의 남편 아서 역의 존 마가로는 모두 절제된 연기를 통해 감정의 진폭을 느끼게 한다. 특히 마지막 30분간의 감정의 밀도는 숨 막히도록 아름답다. 해성이 뉴욕에 방문해 노라와 함께 보내는 마지막 날, 셋이 함께 저녁을 먹는 장면은 극도의 긴장감과 슬픔이 교차한다. 아서는 자신의 아내가 어떤 감정의 층위를 지나왔는지를 인정하고, 해성은 그녀를 보내기로 한다.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한다. 이 영화는 이별을 비극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이별’을 통해 사랑의 또 다른 형태를 보여준다.

영화는 한국적 개념인 ‘인연(因緣, in-yeon)’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한다. 이는 전생에 옷깃만 스쳐도 이번 생에서 마주하게 된다는 불교적 사고에 기반한 개념이다. 셀린 송 감독은 이 ‘인연’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사랑과 삶이 반드시 소유로 귀결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노라와 해성은 결코 함께할 수 없지만, 그들이 나눈 감정은 분명 ‘진짜’였고, 그것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감정은 삶의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 흔들리고, 또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계속 살아간다.

놀라운 것은 이 영화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굉장히 조용하다는 점이다. 음악도 과하지 않고, 카메라는 인물을 쫓되 몰래 숨죽이며 관찰하는 듯한 시선으로 유지된다. 감독은 마치 관객에게 “이들의 감정을 속단하지 말고, 그저 함께 있어달라”라고 말하는 듯하다. 감정은 종종 말보다 깊고, 행동보다 강렬하다. 《Past Lives》는 바로 그 감정의 물결을 조용히 따라간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문득 떠오른 사람이 있었다. 언젠가 스쳐 지나갔지만 끝내 말을 걸지 못했던 누군가, 혹은 나와는 다른 길을 선택해 멀어져 간 친구, 오래전 이별을 고했던 사람들. 그들과 나 사이에도 어떤 인연의 조각들이 남아 있지 않을까. 《Past Lives》는 이런 감정을 일깨운다. 우리 모두의 삶에는 되짚어볼 수 없는 과거가 있고, 되돌릴 수 없는 선택들이 있으며,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모두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라고. 우리가 서로의 삶에 스친 순간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의 결을 만들었다고.

총평:
《Past Lives》는 단순한 사랑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 스며든 시간, 선택, 기억, 관계, 그리고 놓쳐버린 모든 것들에 대한 영화다. 셀린 송 감독은 놀라운 절제와 감성으로 ‘말해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풀어냈고, 관객은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는 끝났지만, 그 감정은 오래도록 남는다. 마치 흘러간 사랑처럼, 마치 기억 속 한 장면처럼.